벤야민은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머리말을 통해 이 글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 분명히 밝혀 놓는다.
예술발전 경향에 관한 테제는 일련의 전통적 개념들, 이를테면 창조성, 천재성, 영원한 가치와 비밀 등을 제거해 버린다. 이러한 전통적 개념들은, 만약 그것이 아무런 통제 없이 주어지는 실증적 자료의 검토를 위해서만 이용된다면 파시즘적 의미로 사용될 가능성이 크다. (반성완 역,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p. 198)
그런데 벤야민은 자신의 새로운 예술이론의 개념들이 파시즘에 의해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며 “예술 정책에 있어서 혁명적 요구를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한다.
벤야민은 역사적 사례들을 들어가면서 자신의 논의를 전진시킨다. 예술작품의 복제는 언제나 가능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인간의 손이 하느냐 아니면 기계가 하느냐에 있다. 그리스인들의 주조와 인각 기술, 청동제품, 테라코타, 주화 등을 예로 든다. 기술의 발전은 예술작품의 내용을 바꾸어 놓는다. 예컨대 석판인쇄술의 발명은 일상생활을 담은 그림을 가능케 한다. (예를 들어,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은 사진을 기념을 위해 찍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담는 것으로 개념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복제기술은 점점 발전되었는데 그 정점에 오른 것이, 벤야민이 보았을 때는 사진과 영화였다. 사진은 손으로 대상을 그리던 것에 비할 수 없는 속도와 정확성을 가져왔다. 이제 손이 아니라 눈이 그리게 된 것이다.
벤야민은 복제기술의 두 가지 상이한 표현양상을 드는데 그것은 바로 “예술작품의 복제”와 “영화예술”이다. 예술작품의 복제는 진품의 존재를 전제한다. 복제된 작품은 진품만이 가지는 “유일무이한, 단 일회적인 현존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아우라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예술에서의 복제는 그 자체가 작품을 만들어 내는 원리이다. 영화에는 원본이 없다. 원본이라면 카메라 앞에 섰던 피사체일 텐데 그것은 카메라에 담기는 순간 덧없이 사라진다. 따라서 영화에서는 진품성을 거론할 수 없다. 벤야민은 바로 이 점에서 영화의 정치적 가능성을 엿본다. “복제기술은 복제된 것을 전통의 영역으로부터 분리시킨다.” 벤야민이 인용한 아벨 강스의 말을 들어보자.
셰익스피어, 램브란트, 베토벤이 영화화될 것이다. 모든 전설, 모든 신화, 모든 종교의 창시자, 모든 종교까지도 필름을 통해 부활될 날을 기다리고 있으며, 또 모든 영웅들이 영화의 문전에 몰려들고 있다. (p.203)
따라서 영화는 “전통적 가치를 청산한다.” 아우라가 없는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 때문에 그 안에 담긴 대상은, 그가 교황이건 날품팔이이건 단지 보는 대상이 될 뿐이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 중에 눈을 마주치치 못할, 범접하지 못할 대상은 없다. 벤야민은 이것을 “영화의 카타르시스적인 면”이라고 불렀다. 벤야민은 이렇게 권위를 파괴하는 성격 때문에 영화는 대중운동의 매개체로서 훌륭하게 사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벤야민은 역사적 관점에서 아우라가 왜 붕괴될 수밖에 없는지 살핀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이것들은 다 “대중의 욕구”와 관련되어 있다. 대중은 사물을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 들이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또 사물의 일회적 성격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로부터 떼어내는 일, 다시 말해 분위기(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현대의 지각작용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예술작품의 진품성은 전통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 있다. 벤야민은 대표적인 예로 “종교의식 속의 예술작품들”을 든다. 예술 작품의 아우라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고 유지되었다. 현대적이고 세속적인 예술작품에 대한 “숭배”도 역시 종교의식적인 산물이다. 그런데 사진의 등장은 이러한 “미에 대한 숭배”에 위기를 가져왔다. 벤야민은 사진술과 사회주의의 성장이 예술을 위기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벤야민 특유의 재치있는 표현에 따르자면 서구 사회는 “예술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지상주의의 이론으로서 이 위기에 대처했다.” 이 신학은 부정적 신학일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예술작품에는 “일체의 사회적 기능”이 박탈되어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사진과 영화의 등장으로부터 비롯된 예술의 위기, 즉 아우라의 상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예술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아우라의 상실은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즉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그동안의 종교적 의식이라는 종속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진품성의 척도가 효력을 잃은 지금에는 예술의 사회적 기능도 변혁을 겪는다. 예술작품은 종교 의식적 근거를 둔 사회적 기능에서 정치에 그 근거를 두는 사회적 기능을 갖게 된다.
벤야민에게 사진이나 영화가 예술성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당대의 논쟁은 우스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사진의 발명으로 인해 예술의 전체 성격이 바뀐 것이 아닐까”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기능성은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대중은 아우라를 상실한 작품 앞에서 비평적 태도를 가지게 된다. 즉 감상자가 예술작품에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니라 예술작품이 감상자에게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