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열린 텍스트
어떤 텍스트든지 그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는 대개 첫머리에 놓여있기 마련이다. <노자> 역시 그렇다. 노자는 도의 실체를 잡으려는 시도와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여 대상의 본질을 고정시키려는 일체의 노력이 부질없는 것임을 설파한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道)라고 말하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고, 명(名)이라고 불리는 명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저 유명한 <노자>의 첫 구절을 새삼 인용하는 데는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 첫 문장 자체가 <노자>라는 텍스트의 성격을 단박에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는 ‘도(道)’에 대해서 확정적인 언술을 하지 않는 대신 연속적으로 비유를 사용한다. 어쩔 수 없이 ‘도’라는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그 이름마저도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수단은 될 수 없다. 이름붙이기란 일시적이고 임의적인 방편일 뿐이다. 따라서 『老子』라는 텍스트 자체도 ‘도’를 깨닫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이해해야지 ‘이 안에 도에 이르는 길이 있다’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노자가 제시한 독법은 산책이나 대화에 가깝다. 목적지를 정해두고 그곳을 향해 달려가거나 ‘이것이 진리다’라는 권위의 독백은 전혀 노자적(老子的)이지 못하다.
필자는 『老子』를 읽으면서 러시아의 문예이론가 미하일 바흐찐이 자신의 대화주의(Dialogism)를 쉽게 풀이한 다음과 같은 언명(言明)을 떠올렸다. “모든 인간은 서로를 알아야 하고,서로에 관해 알아야 하고,서로 접촉해야 하고,얼굴을 맞대야 하고,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모든 것은 서로를 대화적으로 비춰주어야 하고 다른 모든 것 속에서 되비쳐져야 한다.” 바흐찐은 어떤 텍스트도 최종적인 것이 아니며 어떤 해석도 독백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은 『老子』가 바흐찐의 대화주의에 입각한 열린 텍스트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2. 산책
산책은 어딘가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행위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릴없이 떠도는 배회(徘徊)도 아니다. 산책은 심신의 긴장을 이완시켜주며 사물과 교감하는 능력을 배양시켜주는 느슨한 형태의 육체적이면서 정신적인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당장 해결할 일이 있어서 마음이 바쁜 사람에게는 산책을 즐길 여유가 없다. 또한 무기력증에 빠져 바깥으로 나가볼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에게 산책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老子』를 산책하듯 읽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아주 낯선 여행지를 둘러보는 것을 산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산책의 공간은 지나치게 낯설어선 곤란하다. 늘 지나다니는 곳, 익숙해서 오히려 무엇무엇이 있는지 눈여겨보지 않고 지나칠 수 있는 곳을 우리는 산책한다. 그래서 산책길에는 뜻하지 않은 만남이 존재한다. 『老子』에 나타난 생태주의, 부드러움의 철학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 속에서 생명존중, 여성성, 평화 같은 개념은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한 것이어서 별다른 숙고 없이 지나치기도 쉽다. 길가에 핀 꽃의 아름다움을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하고 놀라듯이 필자는 『老子』를 읽으며 감탄한다. 노자의 길(道) 위에는 이름(名)을 알 수 없는 꽃들이 변화무쌍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제 필자의 눈에 들어온 몇 송이 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야겠다. 그러나 그 꽃들에게 하나의 명확한 이름을 붙이지는 않기로 한다.
3. 보편적 상대주의
노자는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강함과 약함, 사랑과 미움, 여성과 남성, 음과 양, 비움과 채움 등을 상대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다. 아름다움도 추함이 있어서 생기는 관념이고 추함도 아름다움이 있어서 생기는 관념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그 무엇을 상정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그룹에 따라 무엇인가를 절대적인 가치로 만들어서 스스로 고통을 받고 타자를 괴롭히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여러 나라에서 여전히 진행중인 민족갈등과 종교분쟁, 각 문화권별로 타 문화를 배척하는 태도, 계급 간의 끝없는 싸움 등을 보면 보편적 상대주의는 아직도 이상에 불과하다.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끝없이 경제성장을 추구하면 지구의 어느 한쪽에선 굶주림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동안 계속 ‘채움’에 급급했다면 상대적으로 ‘비움’을 강요당한 사람들의 설움을 헤아려야 한다. 이것은 국제 사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재벌의 주머니가 황금으로 채워질 때 노동자들의 주머니는 동전 한 닢마저 사라지게 된다. 노자가 말한 보편적 상대주의에 입각해서 자연스러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4. 평화
이 글을 쓰고 있을 즈음에 뉴스에선 서해방위사령부의 출범 소식을 전했다.1 노자 식으로 말해서 상서롭지 못한 일이었다. 정부는 북의 도발이 있을 경우 황해도까지 타격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평화를 위한 노력은 별로 보이지 않는데 전쟁을 위한 준비는 아주 눈에 잘 보인다. ‘전쟁이란 사람이 죽는 것이므로 이기더라도 슬피 울고 상례를 갖추어야 한다’는 노자의 가르침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부드러운 것으로 단단한 것을 사로잡는 지혜와 포용을 지닌 이를 찾기가 이토록 어렵단 말인가!
5. 小國寡民
『老子』를 정치철학으로 읽는 것도 흥미로운 독법 중 하나이다. 특히 진정한 의미에서 소국(小國)과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노자의 국가관은 지방자치제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많은 영감을 던져준다.
중앙정부가 무리하게 추진한 4대강사업을 본받듯이 각 지자체가 경쟁적으로 벌이고 있는 신청사 공사를 비롯한 수많은 토목공사는 시민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노자는 군왕이나 관리가 가급적 일을 벌이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백성들에게 무엇인가 강요를 하지 않음으로서 그들 스스로 즐겁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거처하는 곳을 평안하게 여기며 그 풍속을 즐기게” 하는 것에서 정부는 스스로가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구별해야 할 것이다.
뉴타운을 한답시고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으면서 ‘도시개발’ 운운하는 것은 망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민들이 “풍속을 즐기”려면 문화적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각 구청, 동사무소마다 배움터를 마련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교육의 장을 열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예술의 향기를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도 맡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동체를 회복시켜야 한다. 전세값이 폭등해서 어쩔 수 없이 2년마다 이사를 가야한다면 지역 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없을 것이고,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애정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이미 한국도 국가적 차원에서는 소국을 넘어선 지점에 있고 과민이라고 할 수 없는 인구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노자가 말한 ‘소국과민’의 이상적 사회는 기실 현재의 지방자치, 그것도 기초자치단체 단위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중앙정부의 재정 지원만을 목을 빼고 기다리지 말고, 쓸데없는 토목사업을 벌이지 말고, 문화의 진흥을 위해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서 지역이 부동산 기대심리로 춤을 추는 곳이 아니라 이웃과 문화적 삶을 공유하는 삶의 터전으로 만들어야 한다.
6. 謙下
고전읽기는 반성과 성찰을 도모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노자는 ‘공을 세우고 나서도 티내지 않는’ 자세를 여러 차례 강조한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여러 번 강조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가장 낮은 자, 남을 섬기는 자가 결국 가장 높은 자’라는 역설은 위계질서와 권위의식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살면서 알게 모르게 내면적으로 받아들인 서열주의를 반성하게 한다.
한국 사회는 평등의식이 어느 나라보다도 팽배해 있으면서도 자기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을 ‘사뿐히 즈려밟고도’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이상한 습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다들 각개약진으로 더 높은 곳을 향해서 타인의 어깨를 밟고 오르려고 한다. 많이 배우고 힘 있는 사람들 중에서 겸손한 사람을 찾기가 참 힘들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불행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자의 ‘겸하’는 이른바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성원 모두가 가슴에 새겨둘 필요가 있겠다.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라는 사람이 공이 있을 때는 텔레비전에 나와서 “이건 제가 지시한 일입니다!”라고 티를 내고, 문제가 생겼을 때는 싹 모습을 감춘다. 그런 행태는 너무나 반노자적(反老子的)일 뿐만 아니라 그가 믿고 있다는 기독교의 가르침과도 정면 배치되는 것이어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그에게도 ‘겸하’를 권하고 싶다.
7. 대화
노자와 산책하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는 확실한 답을 주지는 않고 빙그레 웃음만 짓거나 어린 나무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대화란 본디 서로가 처한 곳의 좌표를 알려주고 그 거리를 가늠하기 위한 것이니 너무 아쉬워해서는 안 되겠다. 한 학기가 끝났다고 해서 노자와 영영 작별하는 것도 아니니 더욱 그렇다.
노자를 읽으며 내내 그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은 이것이다.
“선생님이 사실 때와 지금은 천양지차입니다. 선생님이 살던 시대는 농업이 거의 산업의 전부였죠. 지금은 너무 복잡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삶의 속도도 선생님이 살던 시대보다 너무나 빠릅니다. 그런데도 ‘도’라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존재하는 건가요?”
노자는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라고 해두었잖니. 네 삶의 구체적인 국면 속에서 ‘도’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지, 책속에 틀어박혀 있는 게 아니란다.”
“선생님, 그렇다면 『老子』를 읽지 않아도 ‘도’를 깨칠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이지.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떻게 ‘도’라고 이름붙이고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었겠느냐. 하지만 주의할 것이 하나 있다. ‘도’를 깨치더라도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오로지 실천뿐이다!”
출처: http://writing101.tistory.com/category/수필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