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편으로서의 환상
<은하철도의 밤>은 미야자와 켄지가 여러 번 수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미완성 원고로 남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편 위주의 미야자와 켄지 작품군 중에서 가장 긴 작품에 속하고, 우주 공간으로까지 문학적 상상력을 확대시킨 작가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이런 이유로 <은하철도의 밤>을 중심으로 미야자와 켄지의 문학 세계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은하철도의 밤>은 ‘오후 수업’, ‘인쇄소’, ‘집’, ‘켄타우로스 축제의 밤’, ‘천기륜 기둥’, ‘은하정거장’, ‘북십자성과 플라이오세 해안’, ‘새를 잡는 사람’, ‘조반니의 차표’ 이렇게 9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첫 장인 ‘오후 수업’에서 독자에게 가장 먼저 제시되는 이미지는 ‘은하’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강이라고 하거나 젖이 흘러내린 흔적이라고 말하는 이 희뿌연 게” 무엇인지 묻는다. 조반니가 속으로 대답한 것처럼 은하는 강이나 젖으로 보이지만 사실 수많은 별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답은 마지막 장면에서 캄파넬라가 강물에 빠져 (죽음이 암시되지만) 실종된 것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캄파넬라는 <쏙독새의 별>에 나오는 쏙독새처럼, 천상이 아니라 강물 속에서지만, 별이 된 것이다. 이렇게 구조적으로 <은하철도의 밤>은 이미지의 연상 작용에 의해서 전체의 구성이 매우 탄탄하다.
독자가 <은하철도의 밤>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고유명사는 ‘캄파넬라’다. 왜 일본의 이와테현에 머물면서 농민운동을 하고 동화 창작을 한 미야자와 켄지가 이런 외래 이름을 쓰게 된 것일까. 여러 가지 추즉이 가능하지만 그가 에스페란토어를 배웠다는 데에서 어떤 암시를 받을 수 있다. 에스페란토어 사용자들은 단일 언어에 의한 평등한 의사소통을 통해 세계 평화가 도래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또 그들은 민족과 국가를 뛰어넘는 국제 보편주의를 꿈꿨다. 이런 점에서 국적을 알 수 없는 인물을 등장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은하철도의 밤>의 주인공은 조반니다. 그는 알고 있는 문제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아이다. 아버지는 원양어업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고, 어머니는 병중이다. 소년가장으로서 인쇄소에서 작은 활자를 찾아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어머니에게 빵과 우유를 사다준다.(우유 역시 은하수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그는 약자 중의 약자로 아이들에게도 놀림감이 된다. 미야자와 켄지는 이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미야자와 켄지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나서 가난한 자들의 희생으로 호의호식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는 부유한 아버지를 떠나서 농민들 곁에서 살았으며 농민들과 함께 일하고 그들이 먹는 밥을 먹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볼 때 조반니와 캄파넬라는 작가의 양 분신과도 같다.
‘인쇄소’ 장면에서 다른 아이들은 모두 “은하수 축제일”이어서 들뜬 기분으로 “푸른 등불”을 강물에 띄어 보낼 궁리를 할 때, 조반니는 일터로 향한다. 어머니에게 사다줄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다른 식자공들의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그는 묵묵히 일한다. 그가 은화 한 닢을 받고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주위가 떠나가라 큰 소리로 인사”하는 것을 보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매우 낙천적임을 알 수 있다.
'집’ 장면에서 독자는 조반니와 엄마의 대화를 통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게 된다. 둘의 대화를 통해서 누나의 존재를 알 수 있는데 누나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버지 역시 둘의 대화를 통해 어디선가 고기를 잡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등장하지 않는다. 조반니는 아이들이 아버지의 부재를 이유로 자신을 놀린다고 털어놓으면서 캄파넬라만은 자신을 놀리지 않고 불쌍하게 여긴다고 말한다. 엄마의 대답을 통해 독자는 캄파넬라의 아버지와 조반니의 아버지가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을 알게 된다. 조반니는 캄파넬라 집의 장난감 기차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이것은 뒤의 장면에 나올 은하철도 여행에 대한 복선이다. ‘집’ 장면을 살펴보면 조반니가 가난한 환경에 처해 있지만 엄마와의 관계가 대단히 돈독하고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깊은 신뢰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켄타우로스 축제의 밤’ 장면에서 조반니는 자넬리에게 놀림을 당한다. 그러나 조반니는 버럭 화를 내긴 하지만 자넬리를 미워하지는 않는다. 이 장면부터 은하철도 여행까지 몽환적인 분위기가 고조된다. “수많은 등불과 나뭇가지로 아름답게 장식된 거리”라든가 “네온등이 환하게 켜져 있는 시계방”의 장식품들을 보면서 조반니는 “넋을 잃”는다. 정신을 차린 조반니는 배달되지 않은 우유를 찾기 위해 목장에 갔지만 주인이 없어서 허탕을 친다. 목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반니는 반 아이들이 쥐참외등불을 들고 오는 것을 본다. 아이들은 집단적으로 조반니를 놀린다. 주동자는 자넬리다. 그런데 캄파넬라는 그 속에 끼어 있으면서도 “너무나 안됐다는 눈길로, 조용히 미소를 지으면서 화나지 않느냐는 듯이” 조반니를 쳐다본다. 조반니는 깊은 슬픔을 느끼고 달리기 시작한다. 아마도 캄파넬라의 방관자적 태도가 조반니를 슬프게 했으리라. 이와 연관해서 마지막 장면에서 물에 빠진 자넬리를 구하고 캄파넬라가 사라진다는 점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은하철도 여행에서 돌아온 조반니는 캄파넬라가 자넬리를 구하고 물에 빠져서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조반니는 캄파넬라의 아버지에게 캄파넬라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말하지 못하고(이것은 첫 장면에서 답을 알고도 대답 못하는 것과 같음) 우유를 가지고 엄마가 있는 집으로 가기 위해 마을로 뛰어간다.(이것 역시 인쇄로로 가는 것과 같음)
조반니는 환상의 여행을 통해서 현실도피적인 사람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현실을 더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친구의 죽음을 은하철도 여행과 중첩시켜 놓음으로써 미야자와 켄지는 환상이라는 방편으로 성장 서사를 구축한다.
‘천기륜 기둥’과 ‘은하 정거장’ 장면은 은하철도 여행의 준비와 출발로 묶어볼 수 있다. ‘은하 정거장’으로 곧바로 넘어가는, 즉 현실 세계에서 환상 세계로 바로 자리를 옮기는 것은 여러모로 핍진하지 않기 때문에 ‘천기륜 기둥’ 장면이 삽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반니는 아이들의 놀림을 피해 달렸고, 피곤에 지쳐 잠에 든다. 그리고 꿈속에서 ‘은하 정거장’으로 이동한다. 그는 곧장 은하철도에 탑승하고 캄파넬라를 만난다. 이 작품을 거듭 읽으면 캄파넬라가 미리 열차에 타 있던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은하철도는 망자를 실어 나르는 교통수단이다. 자넬리를 구하고 캄파넬라는 죽어서 은하철도를 탄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 캄파넬라의 모든 대사는 아무런 무리 없이 다 이해된다. 이렇듯 ‘심상스케치’라 불린 그의 시작(詩作)처럼 <은하철도의 밤>은 시적 묘사로 가득하지만 이야기 구성이 매우 탁월하다. 은하철도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조반니는 캄파넬라와의 여행이라 “하늘로 뛰어오르고 싶을 만큼” 기분이 좋다.
'북십자성과 플라이오세 해안’ 장면에서는 미야자와 켄지의 종교관을 살펴볼 수 있다. 그가 일련종에 매우 심취했고, 유언으로 『묘법연화경』 1000부를 지인에게 나눠주라고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은하철도의 밤>은 그의 다른 작품이 그렇듯이 굳이 ‘불교적’이라고 이름 붙이기 어렵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멋진 새하얀 십자가가 북극의 구름으로 만들었다고 할 만큼 시원한 황금빛 원광(圓光)을 받으며, 평평한 섬 꼭대기에 조용히 서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앞에서도 뒤에서도 찬양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뒤를 돌아보자, 언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는지, 검은 표지의 성경을 가슴에 안고 수정 염주를 목에 건 여행객들이, 공손히 손을 모아 그 빛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위와 같이 기독교적인 분위기가 <은하철도의 밤>에 나타나기도 하고, “용담화” 같이 불교적인 제재도 등장한다. 이런 점은 미야자와 켄지가 불교적 신앙을 갖고 있었음에도 타 종교에 대해 열려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제도적 종교를 초월한 신앙의 소유자였음을 알려준다.
‘새를 잡는 사람’은 <은하철도의 밤> 중에서도 아주 압권이라고 생각되는 장면이다. 우주 공간에서 여러 가지 새를 잡는 새잡이는 조반니와 캄파넬라에게 자신이 잡은 것들을 먹도록 권한다. 새는 먹어보니 과자다. 새잡이는 마음씨 좋게 자신의 소유물을 나눠 주지만 조반니는 새잡이를 “아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빨간 수염을 기른 새잡이는 아이들이 보기에 그다지 호감을 가질 수 없는 외모를 지녔다. 그런데 새잡이가 사라지고 나자 조반니와 캄파넬라는 괴로워한다.
“그 아저씨는 어디로 간 걸까?”
캄파넬라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습니다.
“글쎄, 어디로 갔을까? 어디에서 또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왜 그 아저씨와 많은 얘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나는 그 아저씨가 귀찮았어. 그래서 지금 너무나 괴로워.”(55면)
조반니는 아마 이제 이런 아저씨와 만나면 그의 호의를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으리라. 타자와의 만남이 단 일회적일지라도 그것이 마음속의 괴로움으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얘기”로 환유되는 것처럼 진정한 소통에의 노력이 필요하다.
'조반니의 차표’ 장면은 매우 길고, 은하철도 여행(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검표를 위해 내민 조반니의 차표는 다른 승객들의 그것과 매우 다르다. 조반니의 차표는 어느 차원으로든 이동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차표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은하철도의 여러 승객들 중에서 조반니가 매우 특별한 존재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여러 승객들은 그들의 진술을 통해서 이미 죽음 사람임이 드러난다. 미야자와 켄지는 특유의 유려한 문체로 이들 망자를 괴기스럽지 않게 그려낸다. 조반니는 망자들의 진술을 듣고 “정말로 그 사람이 불쌍하고, 왠지 미안한 생각도 든다. 나는 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하며 우울해진다. 이때 나오는 등대지기와 청년의 대화는 <은하철도의 밤>의 주제를 선명히 드러낸다. 그것은 “최고의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수많은 슬픔도 겪어야 하지요.”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다.
소녀와 캄파넬라의 대화를 듣는 조반니는 슬픔에 빠진다. 어떤 연구자는 아버지의 부재, 해달윗도리 등을 근거로 들어서 조반니가 남성성을 확보하지 못했고, 따라서 캄파넬라를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조반니가 소녀에게 질투를 느끼는 것이라 썼는데 일리가 전혀 없는 얘기는 아니지만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전체적인 서사를 분석해 볼 때, 이것은 산 자와 죽은 자가 어쩔 수 없이 멀어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지 삼각관계는 아닐 것이다. 조반니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친구를 떠나보내고 현실로 다시 돌아와서 성장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캄파넬라는 자넬리를 구하다 죽고, 꿈에서 깬 조반니는 이 소식을 듣는다. 조반니는 자신의 꿈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알게 되어 슬픔을 느낀다. 중요한 점은 조반니의 은하철도 여행의 의미, 즉 환상의 비밀을 풀 열쇠는 캄파넬라의 죽음, 즉 구체적 현실이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야자와 켄지는 어린이 독자를 의식적으로 배려해서 창작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시에서 출발한 그의 문학이 산문으로 확대된 것에는 농민운동과 대승불교 신앙에서 비롯된 계몽의 욕구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계몽의 방편이 설교가 아니라 환상을 체험케 하는 것이었다는 데서 그의 작가적 탁월함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