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행여나 제주도에 가시거든
제가 석주명(石宙明, 1908-1950) 선생의 함자를 처음 접한 때는 1989년 겨울이었습니다. 당시 중학교 1학년생이던 저는, 지금은 자취를 감춘 종로서적에서 『위대한 학문과 짧은 생애: 나비박사 石宙明 評傳』이라는 책을 들고 살까 말까 고민을 했었죠. 책의 앞표지에는 흰 가운을 입고 나비를 관찰하고 있는 석주명 선생의 젊은 시절 모습이 박혀 있고, 뒷표지에는 선생이 최초로 발견한 한국산 나비 5종이 컬러 사진으로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보았던 유리창나비, 수노랑나비, 도시처녀나비, 깊은산부전나비, 성진은점선나비 같은 나비들은 그 생김새와 이름이 다 생소했습니다. 그런데 나비 따위를 세계 최초로 발견해서 학명에 자기 성(姓)을 붙이는 일이 그다지 대단하게 느껴지지가 않더군요. 게다가 그 아래 선생을 수식하는 문구들이 너무 화려해서 오히려 믿음직스럽지가 않았습니다. 선생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산을 오른 산악인”, “한국 최초로 방언사전을 펴낸 겨레사랑 국학자”, “음악을 사랑하고 제주도 민요를 채보한 아마추어 음악가”, “국제어 에스페란토 보급에 힘쓴 세계평화주의자”, “포충망을 들고 나비 쫓아 한반도를 종횡으로 뛴 곤충학자”, “일제치하에서 ‘국제인시류학회’ 정회원으로 피선된 조선인”,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시간을 가장 잘 아껴 쓴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의 평전을 구입했다면, 그리고 그 책을 읽었더라면 제 인생의 행로는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읽지’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늘 그렇듯이 ‘나중에’는 기약을 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예기치 않은 때에 선생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는 연극 한 편을 볼 수 있었습니다.
2006년 늦가을에 그리스의 연출가 미하일 마르마리노스가 연출한 연극 <애국가: 함께함의 공식>에서 뜻하지 않은 순간에 가장 시적으로 석주명 선생과 재회한 것입니다. 마르마리노스는 매우 짧은 시청각적 이미지들로 20세기가 우리들 각자에게 무슨 의미였는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 연극에 석주명 선생이 잠깐 등장합니다. 석주명 선생은 6·25가 터졌는데도 남산 기슭의 국립과학관으로 매일 출근을 합니다. 지인들이 모두 피난을 권유했지만 선생은 연구할 것이 있다면서 거절을 하지요. 그런데 9·28 수복 직전, 즉 서울 탈환을 위해 UN군의 공습이 시작되고 국립과학관은 한 줌 재가 됩니다. 선생이 평생 모은 나비 표본 15만 마리도 전부 불타버리고요. 며칠 뒤 깊은 상심에 빠진 채로 충무로를 걷던 선생은 인민군 소좌로 오인되어 국군의 총탄을 맞고 서거하셨습니다. “빨갱이 천지인데 왜 피난을 가지 않고 있었지? 너는 인민군 소좌야. 그래서 서울 거리를 활보하는 것 아니냐?” 인민군으로 오인 받은 석주명 선생은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고 합니다.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오!” 이 절규가 선생의 유언이 되었습니다. 당시 선생은 『한국산 접류 분포 지도』를 출간할 생각으로 마음이 바빴다고 합니다. 마르마리노스는 6·25의 비극성을 선생의 비극적 사망 사건으로 압축적으로 제시했는데 저는 그 장면이 대단히 마음에 들어서 다음 날 그 연극을 다시 보러 갔습니다. 두 시간 반이나 되는 공연 시간 중에서 선생이 등장하는 시간은 불과 2-3분 정도였는데 말입니다.
그때 가지고 다니던 수첩에 ‘나비 박사 석주명에 관해 알아볼 것’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만 하루 이틀 미루는 통에 그 생각도 결국은 나비처럼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석주명 선생에 대해 공부할 두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스스로 놓아 버린 것이지요. 무엇이든지 착상을 하면 그 즉시 실행해서 결과물을 내놓았던 석주명 선생의 성실성에 비추어 본다면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삼 세 번이라고 세 번째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2010년 1학기 학술답사를 제주도로 간다고 하기에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찾아보던 중에 제주도의 시민단체와 학계, 행정당국을 망라해서 ‘석주명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여러 기사를 통해 석주명 선생이 2000년대에 들어서 ‘제주학(濟州學)의 선구자’로서 재조명되고 있으며 학술행사도 여러 차례 거행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석주명 선생이 2008년에야 국립과학관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것과 마찬가지로 만시지탄(晩時之歎)의 한(恨)이 있지만 참으로 다행스런 일입니다.
세 번째 기회를 놓치면 평생 다시 기회가 없으니 이번에는 석주명 선생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하여 선생에 대한 평전은 물론이고 선생이 직접 쓴 책을 입수하여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감탄을 연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42년의 짧은 생애 중 스무 살 이후의 삶은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바쳐진 것이었습니다. “나는 단 한 줄의 논문을 쓰려고 나비 3만 마리를 매만졌다”는 선생의 술회에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존경을 표할 수밖에요.
석주명 선생은 1908년 평양에서 태어나 개성 송도고보를 거쳐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업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귀국을 한 뒤에는 함흥 영생고보와 개성 송도고보에서 박물(생물) 교사로 일했습니다. 이 기간이 선생의 나비 연구의 황금기였습니다. 13년간 교사로 일하면서 선생은 온 국토를 돌아다니며 75만 마리 나비를 채집했고 이를 계통별로 분류해서 그때가지 잘못되었던 조선산 나비 연구를 바로잡았습니다. 선생은 같은 종임에도 다른 종으로 분류되어 844종이라던 조선산 나비의 종류를 248종으로 분류하고 나머지를 퇴출시켰던 것이죠. 이 연구는 아무런 흠결이 없는 완벽한 것이어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초급대학을 나온 식민지의 교사의 연구가 제국대학의 생물학 교수들의 연구를 격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에 발맞추어 석주명 선생의 영문판 저서 『조선산 접류 총목록』이 영국왕립아시아학회의 지원으로 출간됨으로써 선생은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이때 선생의 나이가 33세였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선생의 학문적 업적은 대단한 것인데 더 놀랄만한 연구가 선생의 타계 직전까지 계속됩니다.
선생은 나비에 대한 단순한 목록 작성에서 학문 연구를 출발했는데요, 이것은 개체변이 연구로 심화되었으며 종국에는 분포 연구로 확대되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선생은 나비 연구에서 얻는 문제 인식, 방법론을 인문학에까지 접목시켰습니다. 명논설인 「國學과 生物學」을 읽으면 선생이 자연과학자로 출발했지만 인문학까지 학문 세계를 포괄하고 있으며 우리가 이른바 ‘통섭’이라고 부르는 학문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에까지 근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생은 평생 나비 연구를 쉬지 않았지만 그 와중에 에스페란토어 교과서를 집필했고 제주도 방언을 수집하고 연구했으며 나비 이름의 유래를 찾기 위해 국어 연구에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국제평화주의자였던 선생이 학자들 간의 평등한 교류를 위해 논문초록을 에스페란토어로만 썼던 것은 특기할 만합니다.
석주명 선생은 1943년부터 45년까지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경성제대 부속 제주도 생약연구소 소장으로 일합니다. 당시에 제주도는 상당히 외진 곳이어서 누구도 자원해서 가지 않았는데 선생은 제주도에 자리가 나자 그곳의 나비 연구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해서 자원합니다. 그런데 선생은 나비 연구에만 그치지 않고 제주도의 역사와 자연, 언어, 민속 등 모든 분야를 연구하기에 이릅니다. 제주도에 관한 연구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던 당시에 선생의 제주도 연구 작업들은 지역학으로서의 ‘제주학’ 연구의 시초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섯 권에 달하는 제주도총서 서문에서 선생은 제주도를 ‘나의 연구테에마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선생은 2년 1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제주도의 나비를 연구하는 것은 물론, 조선어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눈을 피해 제주어 단어를 7,000개 이상 수집하고 표준어와 비교 연구했으며 인구, 동식물 분포, 기상 및 기후, 전설, 종족, 역사, 외국과의 교류, 제주도가 낳은 인물, 의식주, 민속, 교통과 통신, 농업, 어업, 임업, 정치와 행정, 교육과 문화까지를 조사하고 연구했습니다. 한 개인이 2년 남짓한 기간에 도저히 할 수 없으리라 여기는 일을 아무런 대가 없이 오로지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서 시행한 것이지요. 직접 제주도총서를 읽어 보신다면 그 방대한 조사 작업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선생의 제주도 연구가 어찌 사랑이 없이 시작되고 마무리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제주도에 가신다면 이 지극했던 나비 박사 석주명의 사랑을 기억해야만 하겠습니다. 더불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던 “나비 밖에 모르는 사람” 석주명의 ‘위대한 학문과 짧은 생애’를 되새겼으면 좋겠습니다.